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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곳에 이사/in Normal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는 뭘까

by rltwnf 2013.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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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는 뭘까(男)


김종훈, 이준우|201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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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10개월째. 왜 헤어져야 하는지, 아니 헤어지고 싶은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여기서 더 이 관계를 유지해서는 안될 것만 같다. 그렇게 혼자서 이별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다른 때보다 크게 웃었다. 실없는 농담에도 꼬박꼬박 호응했다. 그녀가 좀 더 크게 웃기를, 온몸으로 바랐다. 그녀의 미소를 눈동자에, 석공의 마음으로 새겼다.

데이트 코스도 미리 생각해서 정했다.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괜찮은 분위기의 술집에서 와인으로 혓바닥을 적셨다. 데이트다운 데이트였다. 오늘은 그러고 싶었다. 만나고 헤어지기까지, 그녀가 행복했으면 했다.

오늘 하루는 다른 하루와 같지만 다르기를 바랐다. 그녀는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 못했을 거다. 그냥 어제 같은 데이트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그걸 노렸다. 그랬으면 했다.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 결정을 밝히기 전, 그녀에게 괜찮은 하루를 선물하고 싶었다. 나 나름대로 마지막 의식이었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줬다. 그녀는 처음 만난 날처럼 생긋, 웃었다. 지난 10개월, 그녀의 미소 덕분에 설렜다. 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자연스러웠는데 난 어색했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들킬까봐 서둘러 인사했다.

잘 가.

그녀도 대답했다.

잘 가.

그렇게 그녀는 문 뒤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에 우리의 첫 만남이 중첩됐다. 그녀는 집에 갔고, 난 그녀와 헤어졌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헤어지자고 결심했다.

그녀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한 건 한 달쯤 전이었다. 그녀와 함께한 순간을 돌아봤다. 그 다음 우리가 함께할 시간을 그려보았다.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화가처럼 붓만 들고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형태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어제와 같은 하루만 반복됐다. 복사기를 잘못 다뤄 같은 문서를 수십 장 복사한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불필요한 문서 수십 장을 든 인턴사원처럼, 난 그 상황이 아득했다.

선택해야 했다. 결정을 유보하느냐, 이쯤에서 그만두느냐. 딱히 둘 사이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서로 잘 지냈다고, 나름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둘이 바라보는 지점이 달랐다. 나는 결혼도 생각해야 했다. 꼭 내년 이맘 때 결혼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계획이 있고, 단계가 있다. 계획표 자체를 붙여놓을 수 없는 관계라면, 힘이 빠진다. 계산적이지만, 계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기회나 시간이 한정돼 있다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기회가 담배 한 갑처럼 개수가 있다고 느껴졌다. 벌써 내가 몇 대를 폈을까? 남은 담배 개비를 확인하려고 자꾸만 담뱃갑을 쳐다보는 기분. 주변에 담배 살 곳은 없고, 담배는 자꾸 피우는 초조한 상황. 30대가 꺾일 때쯤 확연히 인식했다. 이것이야말로 20대와 30대의 차이였다. 더구나 난 어느새 30대의 중반을 지나쳤다.

20대 때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오래된 연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대체로 오래된 연인은 결혼하든가, 헤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연하지 않는 요소도 있었다. 헤어지는 계기가 달랐다.

내가 본 오래된 연인은 싸우고 헤어지지 않았다. 서로에게 실망하고 헤어지지 않았다. 단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물론 일방적으로 다른 길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싫어졌다거나 하는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둘 사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20대 때는 지금보다 머리가 ‘빠릿’하게 돌아갔는데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감정이 이성보다 우선하던 시기였다. 그렇게도 헤어지는구나, 싶었다. 나는 안 그럴 거라 근거 없이 확신했다. 확실히 근거 없었다.

이제는 알 거 같다. 당시 그들은 서로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 감정이 아닌, 이성적인 그림이었다. 이제는 나도 그런 그림이 필요한 때다. 지난 10개월 그녀와 만나며 더 절실해졌다. 그녀는 나와 함께 캔버스를 바라볼 마음이 없었다.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거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녀의 잘못은 더욱 아니다. 지금 무언가 그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도 과거에 그랬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말없이 화구를 챙겨 자리를 뜰 뿐이다. 그러고 나서 단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거다. 슬퍼하기보다 담담히 인정해야 한다.

휴대폰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는다. 통화 버튼이 또렷하게 보인다. 단지 통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그녀와 연결된다. 헤어지며 끊은 줄을 손쉽게 묶을 수 있다. 하지만 끝내 누르지 않는다. 누르는 순간, 다시 복사 매수를 잘못 입력한 꼴이 될 게다. 끝없이 복사돼 나오는 문서를 속절없이 바라보고 싶지 않다. 복사기 속 A4용지가 몇 장이나 남았는지 불안하다. 불안해서 누를 수 없다.

그녀에게 전화가 오진 않는다. 그녀도 우리 관계의 한계를 느끼는 걸까? 그녀의 침묵이 내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이렇게 내 30대 중반의 연애가 과거로 굳어진다.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매번 씁쓸하다.

담뱃갑을 집어 든다. 담배 한 개비 꺼내 입에 문다. 문득, 담배가 몇 개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손이 떨린다. 휴대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는다.

난 또 다시 이별했다.
- 19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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